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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된 아내 늦은 밤, 잠든 아내를 내려다본다. 씨근대는 호흡의 물살, 아내는 물이 되었다. 물은 불을 덮고 대지를 휘감는다. 큰 그릇에도 어울리며 작은 그릇에도 넘실거리지 않는 아내라는 이름의 여자. 아내는 물이 되었다. 더보기
사이버 게임 - 골뱅이 3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약속처럼 기다림은 만남을 기대하지 않는다. 너를 기다리며 사이버 게임을 한다. 점에서 원으로, 다시 점에서 원으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사이버 머니는 무한 리필이 가능하다. 너를 기다리는 내 마음의 띠에도 마침표는 없다. 그러한 잠시, 초인종 소리에 자리를 비운 사이 너는 접속 기록만 달랑 남겨둔 채 가고 없다. 오늘도 너를 기다리며 사이버 게임을 한다. 게임 머니는 무한 리필이다. 더보기
보리 따사로운 햇살 머금은 벼는 겸손을 가장하지만 한설을 품은 보리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 법이다. 그저 하늘을 우러를 뿐. 더보기
스패앰 - 골뱅이 2 폐지 위에 골뱅이떼 버둥거리고 있다. 아웃룩의 사산아들. 골뱅이는 뱅글뱅글 돌아간다. 나는 어지럼증에 겨워 예리한 칼날 하나를 집어 눈알을 찍는다. 골뱅이의 처절한 단말마, 스패앰! 더보기
골뱅이 골뱅이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다가 떠오른 또다른 골뱅이, 친구의 킬킬거리는 웃음을 뒤로 한 채 컴퓨터를 켠다 아웃룩에서는 수많은 골뱅이가 뱅글뱅글 요동치지만 고소함도 쫀득쫀득함도 묻어나지 않는다. "사이버는 사이비야" 이죽거리는 친구의 말소리를 들으며 아웃룩을 닫는다. 어느 새 친구는 가고 없고 모니터에서 튀어 나온 듯 비닐막 뒤집어쓴 골뱅이 하나,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골뱅이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다가 친구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만 젓가락으로 집는다. 더보기
신용 시대 낮술을 마신 건가, 아니면 대마초를 흡입한 게 아냐? 조 대리는 휴대폰을 뜨악하니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아내임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출근 이후에는 천지가 개벽을 하더라도 전화를 걸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것은 신혼 여행지에서였다. 아내는 한 번도 그 말을 어기지 않았다. 무려 7년의 세월이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아내는 금기를 어긴 것이다. 여보, 여보. 큰일 났어. 아니, 큰일이 아니라 대박이 터졌어.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았어. 현대는 신용 시대라고 했잖아?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하지만 참아요. 탑 시크리트니까. 여보, 사랑해요. 아내는 열에 달뜬 목소리로 사랑한다는 말까지 늘어놓았다. 무언가 대박이 터진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더보기
외식 길게 소음을 끌던 진공 청소기의 작동이 멎었다. 현주는 급한 마음에 개수대에서 걸레를 빨기 시작했다. 분주한 손놀림과는 달리 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졌다. 부엌과 연한 거실에서는 음량을 한껏 높인 텔레비전 소리에 아랑곳없이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큰아이와 이제 막 입학한 둘째 아이가 까불거리고 있었다. 현주는 걸레를 들고 거실 바닥을 훔치기 시작했다. "비켜. 청소하는 게 안 보여?" 현주는 목청껏 고함을 내질렀지만 그 소리마저 아이들에게는 정월 대보름날의 풍악 소리로 들리는지 짓궂은 장난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사내아이란 머리통이 굵어지면 도대체가 뒷갈망이 불감당이었다. "너희들. 아빠에게 이른다. 한 달 내내 엄마 속만 속였다고." 그제야 아이들이 입을 삐쭉거리며 소파에 덜퍼덕 주저앉았다. 갑자기 집안.. 더보기
가슴이 붉은 딱새 오규원 산문집 한 스님이 물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그대는 스물네 시간의 부림을 받지만, 나는 스물네 시간을 부릴 수 있다. 그대는 어느 시간을 묻느냐?" - 에서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실체를 문헌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상실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실증적인 것만이 최선은 아닌 것. 의 저자 오규원은 강원도 영월 무릉의 도원에 머물면서 이 글들을 썼다. 그리고 그 집 곁으로는 이태백의 시구에 나오는 주천(酒泉)이란 강이 흐른다.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 행정 구역이 그러하다. 저자는 말한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곳으로 왔다. 그냥 그득할 수 없을까?" 하지만 세속의 일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 더보기
내일은 오늘과 달라야 한다 조안 리 지음 {내일은 오늘과 달라야 한다}를 읽던 중 언뜻 떠오른 화두 하나. '밀레니엄 버그'가 바로 그것. 밀레니엄 버그(2000년 표기 문제)란 컴퓨터가 2000년 들어 연도를 잘못 인식하면서 전산 시스템 상에 대혼란이 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현 시대를 정확하고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 사건이다. 인류는 바야흐로 진보와 혼돈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1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공포한 그레고리력을 바탕으로 하는 현재의 역법(曆法)은 기독교적인 의미가 강하다. 기독교에서 '밀레니엄(Millennium)'은 정의·평화·번영이 가득한 유토피아적 시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밀레니엄 버그'가 의미하듯 유토피아는 저절로 인류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핏줄과 같이 미세하게 퍼져 있는, 광역.. 더보기
소설 읽기의 여러 잣대 얼마 전의 일이다. 다소 '덜렁기'가 있는 한 여고생이 독서를 하고 있는 모습이 기특해서 표지를 들추어보았다. {좀머씨 이야기}란 제목이었다. 꽤 유명세를 탔던 작품이다. 그 아이가 그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도 유명세 영향이 클 것이었다. 그러나 좀머씨 이야기는 그 아이에게 어렵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어 짐짓 물어보았다. 그 아이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며칠 후 다시 그 아이에게 물었다. 그 아이는 대답했다. 도대체 뭘 말하려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아이는 자기의 지적 수준이 많이 모자란 까닭이라며 자책을 했다. 내용을 소화하지 못한 이유가 지적 소양의 부족 때문인가, 아니면 인생 경험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이러한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