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원 산문집 <가슴이 붉은 딱새>
한 스님이 물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그대는 스물네 시간의 부림을 받지만, 나는 스물네 시간을 부릴 수 있다. 그대는 어느 시간을 묻느냐?"
- <조주록>에서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실체를 문헌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상실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실증적인 것만이 최선은 아닌 것.
<가슴이 붉은 딱새>의 저자 오규원은 강원도 영월 무릉의 도원에 머물면서 이 글들을 썼다. 그리고 그 집 곁으로는 이태백의 시구에 나오는 주천(酒泉)이란 강이 흐른다.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 행정 구역이 그러하다. 저자는 말한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곳으로 왔다. 그냥 그득할 수 없을까?" 하지만 세속의 일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하기 때문에 사유의 끈이 잡혀지는 것은 아닐까?
요즘 서점의 진열대에 꽂힌 책들에는 온통 부박함과 감각적인 것만으로 가득하다. 이제 진지함은 미덕이 아니라, XT 컴퓨터 같은 박물관의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정보화, 세계화의 허명 아래 가공할 정도의 살상력을 가진 '속도감 콤플렉스'는 사유의 공동화 현상을 야기한다. 때문에 깊은 바다와 같이 고요함 가운데서 동양적 사유의 깊이를 드러내는 오규원의 산문은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자연 풍광에 대한 정밀한 묘사뿐만이 아니라 인문과학, 종교와 예술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유의 비상(飛翔)을 통해 저자가 구축한 투명한 수정궁 같은 언어의 결정체를 선보이고 있다.
뜰의 이 자리 저 자리를 구르는 돌들의 피부도 이제는 오랜 밤을 별과 함께 지내더니 별빛을 닮아 은회색이다. 주먹만한 저 은회색의 돌, 아니 저 침묵의 가시적 육체, 아니 저 침묵의 광물적 실존, 저 돌들이 저렇게 지상의 별로 반짝이기까지에는 몇 번의 가을이 이 지구에 있었는가를 말하려면 어떤 존재여야 할까, 에서 보듯이 오규원은 눈 앞에 드러나는 실체뿐만 아니라 존재 너머의 세계에까지 사유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각박한 세태일수록 자기 중심성의 획득은 더욱 필요한 법이다. 사색의 여정을 통해 내면의 깊이를 더할 일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그대는 스물네 시간의 부림을 받지만, 나는 스물네 시간을 부릴 수 있다. 그대는 어느 시간을 묻느냐?"
- <조주록>에서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실체를 문헌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상실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실증적인 것만이 최선은 아닌 것.
<가슴이 붉은 딱새>의 저자 오규원은 강원도 영월 무릉의 도원에 머물면서 이 글들을 썼다. 그리고 그 집 곁으로는 이태백의 시구에 나오는 주천(酒泉)이란 강이 흐른다.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 행정 구역이 그러하다. 저자는 말한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곳으로 왔다. 그냥 그득할 수 없을까?" 하지만 세속의 일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하기 때문에 사유의 끈이 잡혀지는 것은 아닐까?
요즘 서점의 진열대에 꽂힌 책들에는 온통 부박함과 감각적인 것만으로 가득하다. 이제 진지함은 미덕이 아니라, XT 컴퓨터 같은 박물관의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정보화, 세계화의 허명 아래 가공할 정도의 살상력을 가진 '속도감 콤플렉스'는 사유의 공동화 현상을 야기한다. 때문에 깊은 바다와 같이 고요함 가운데서 동양적 사유의 깊이를 드러내는 오규원의 산문은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자연 풍광에 대한 정밀한 묘사뿐만이 아니라 인문과학, 종교와 예술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유의 비상(飛翔)을 통해 저자가 구축한 투명한 수정궁 같은 언어의 결정체를 선보이고 있다.
뜰의 이 자리 저 자리를 구르는 돌들의 피부도 이제는 오랜 밤을 별과 함께 지내더니 별빛을 닮아 은회색이다. 주먹만한 저 은회색의 돌, 아니 저 침묵의 가시적 육체, 아니 저 침묵의 광물적 실존, 저 돌들이 저렇게 지상의 별로 반짝이기까지에는 몇 번의 가을이 이 지구에 있었는가를 말하려면 어떤 존재여야 할까, 에서 보듯이 오규원은 눈 앞에 드러나는 실체뿐만 아니라 존재 너머의 세계에까지 사유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각박한 세태일수록 자기 중심성의 획득은 더욱 필요한 법이다. 사색의 여정을 통해 내면의 깊이를 더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