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fe

외식

  길게 소음을 끌던 진공 청소기의 작동이 멎었다. 현주는 급한 마음에 개수대에서 걸레를 빨기 시작했다. 분주한 손놀림과는 달리 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졌다. 부엌과 연한 거실에서는 음량을 한껏 높인 텔레비전 소리에 아랑곳없이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큰아이와 이제 막 입학한 둘째 아이가 까불거리고 있었다. 현주는 걸레를 들고 거실 바닥을 훔치기 시작했다.

  "비켜. 청소하는 게 안 보여?"

  현주는 목청껏 고함을 내질렀지만 그 소리마저 아이들에게는 정월 대보름날의 풍악 소리로 들리는지 짓궂은 장난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사내아이란 머리통이 굵어지면 도대체가 뒷갈망이 불감당이었다.

  "너희들. 아빠에게 이른다. 한 달 내내 엄마 속만 속였다고."

  그제야 아이들이 입을 삐쭉거리며 소파에 덜퍼덕 주저앉았다. 갑자기 집안이 냉랭해진다. 괜히 흥을 깨버렸다며 현주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옷 갈아입어. 아빠 오시면 바로 나가야지."

  아이들의 발놀림이 또다시 경쾌하게 귀청을 울렸다. 현주는 걸레질을 멈추고 거실 벽에 붙어 있는 뻐꾸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남편이 오려면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다. 괜한 호들갑이지 뭐야. 현주는 걸레를 놓고 거실 바닥에 엉덩이를 놓았다. 방으로 들어간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뭐라 쑥덕거리고 있는지 간간이 웃음소리만 토해내고 있었다.

  현주는 거실의 통유리를 통해 마당을 내다보았다.

  5월의 마지막 토요일, 조금은 이른 듯한 초여름의 햇발이 마당가에 가지런히 놓인 장독대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나지막한 담을 따라 소담스런 넝쿨장미가 만발이다. 어릴 적 그림책을 통해 꿈꾸었던, 넝쿨장미가 가득한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올 때의 희열이란!

  십 년 세월이었다.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살아온 십 년이란 시간은 그야말로 인고의 세월이었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모두를 참아야 했다. 남편에게는 자린고비라고 구박을 받아야 했고, 아이들은 구두쇠 엄마가 싫다며 툭하면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럼에도 꿋꿋이 저축하면서 살아온 덕에 일군 집이었다. 아무렴 어떤가. 오늘 같은 날 맘껏 외식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이었다.

  걸레질을 마친 현주는 안방으로 들어가 옷장문을 열었다. 싸한 나프탈렌 냄새가 코를 찌른다. 옷걸이에 걸린 몇 되지 않는 옷가지들을 모조리 꺼내 놓고 몸에 걸쳤다. 그러나 마음에 쏙 드는 옷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몇 년 동안 외출복이라고 마련한 옷이 한 벌도 없었다. 기껏해야 동네 시장에서 사 입는 허드레 옷도 돈이 아까워 몇 번이나 망설이던 터였다.

  현주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그 중의 하나를 골라잡았다. 색깔이 밝은 물방울무늬의 원피스였다. 칼라가 너무 넓었다. 요즘은 아무도 이런 옷을 입지 않는다.

  남편이 오기 전에 서둘러 외출복 한 벌을 살까? 내가 미쳤지. 그 돈이면…….

  어쩔 수 없는 부엌데기라는 생각을 하며 현주는 손에 잡은 원피스를 몸에 걸쳤다.

  남편의 전화를 받은 것은 아침이었다. 출장이 잦지 않은 남편이었지만 이번은 근 한 달여를 객지에서 떠돌고 있는 터였다. 그러고도 출장지에서 할 일이 남았다고 했다.

  "오후에 집에 들를 거야. 내일까지는 지낼 수 있어."

  현주는 가족 외식을 계획했다. 어쩌다 동네에서 가족들이 갈비를 뜯은 적은 있었지만 이번은 좀더 근사한 곳에서 맘껏 돈을 풀기로 작정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현주는 은행에 다녀왔다. 계획에 없던 예금 인출을 하기란 시아버지가 병원에 갑작스럽게 입원한 일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을 때 아이들은 한동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만 했었다.

  외출 준비를 마친 현주와 아이들은 대문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마자 아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나갔다. 현주는 그 뒤를 애써 귀부인 같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따라나갔다.

  아이들이 벌써부터 재잘거리고 있다.

  "외식?"

  대문간에서 남편은 의아한 시선으로 현주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여보. 오늘 우리 외식해요. 제가 살게요."

  순간, 예상과는 달리 남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져 갔다. 현주는 당황했다.

  "외식? 나 한 달 동안 외식하고 온 사람이야. 당신의 얼큰한 된장찌개가 그리운 사람이라구. 쓸데없는 소리 말구 빨리 찌개나 끓여."

  아이 둘이 슬금슬금 저희들 방으로 사라졌다. 유행이 한참 지난 물방울무늬의 원피스를 입은 채로 찌개에 넣을 풋고추를 숭숭 썰던 현주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른 채 머리 속만 뒤숭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