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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내일은 오늘과 달라야 한다

  조안 리 지음 {내일은 오늘과 달라야 한다}를 읽던 중 언뜻 떠오른 화두 하나. '밀레니엄 버그'가 바로 그것. 밀레니엄 버그(2000년 표기 문제)란 컴퓨터가 2000년 들어 연도를 잘못 인식하면서 전산 시스템 상에 대혼란이 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현 시대를 정확하고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 사건이다. 인류는 바야흐로 진보와 혼돈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1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공포한 그레고리력을 바탕으로 하는 현재의 역법(曆法)은 기독교적인 의미가 강하다. 기독교에서 '밀레니엄(Millennium)'은 정의·평화·번영이 가득한 유토피아적 시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밀레니엄 버그'가 의미하듯 유토피아는 저절로 인류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핏줄과 같이 미세하게 퍼져 있는, 광역 컴퓨터 네트워크 망에 의해 조절되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효율적으로 극복해 내지 못하면 인류사는 거꾸로 가는 시간 여행을 떠나야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뉴 밀레니엄에 대한 장미빛 환상은 이처럼 엄청난 시련과 함께 한다. 마치 제 스스로 껍질을 깨고 부화해야 하는 새 새끼처럼. 또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소쩍새와 천둥이 울어야 하고, 무서리가 내려야 한다는 시구처럼.

  {내일은 오늘과 달라야 한다}의 저자 조안 리의 시선은 제 스스로 껍질을 깨야 하는 새 새끼의 아픔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상(飛翔)을 꿈꾼다. 그것은 실존적 자아로서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자아로서의 존재를 염두에 둔 시선이다.

  조안 리는 이 책에서 '삶의 패러다임 쉬프트(삶의 대전환)'을 촉구한다. 사실, 어느 사회건 간에 패러다임은 있어 왔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봉건제 사회에 적합한 패러다임이, 근대 시민 사회에서는 근대 시민 사회에 합당한 패러다임이 있었다. 패러다임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많은 개인들은 소외감을 호소하고, 시간적인 강박 관념에 내몰리고 있다. 그것은 정체성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정체성 상실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나날이 변화하고 쉴 새 없이 발전하는 사회의 속도감에 비해서 개인적 성취도가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광속(光速)에 비견할 만큼 사회는 격변하는데 비해 개인의 정신적 성장은 일정 수준에 머물러 있는 탓이다. 따라서 '삶의 패러다임 쉬프트'가 필요하다는 조안 리의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극복 방법이다. 조안 리는 '셀프-리포밍' 또는 '셀프-포맷팅'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읽는 이를 다소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셀프-리포밍이란 자신을 비워야 성공이 보인다는 의견이다. 변화하는 흐름을 뒤따르지 못하는, 그래서 시간적인 주변성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자신을 비우라니? 허겁지겁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채워 넣기에도 부족한 판에? 하지만 다음 순간에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랬다. 집을 세우기 위해서는 일정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듯이 사회적 자아로서의 성공을 위해서는 실존적 자아와의 동일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의 논리적 비약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정체성 상실이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부족한 때문이 아니던가. 외화내빈(外華內貧)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 외향성에 치우치다 보면 공허감을 느끼게 됨은 당연한 듯이 느껴진다. 자신을 비우라는 말은 내적 성찰을 하란 말로 여겨진 것이다. 자기 반성을 하란 말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멈춤의 시간이 아니라 도약의 시간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더욱 멀리 뛰기 위해서는 납짝 몸을 웅크려야 하는 개구리처럼.

  가만히 나의 내면을 응시한다. 곰비임비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 한편으로 다가오는 뉴 밀레니엄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 왔던가 하는 자괴감들.

  서둘러 책장을 넘긴다. 저자는 계속해서 따끔한 질책의 말들을 늘어놓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이며 자신과의 데이트 시간을 가지도록 촉구한다. 끊임없는 내적 성찰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릴 따름이다.

  서두르던 손길이 한순간 더뎌짐을 자각한다. 미래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문장들에서다. 어느 새 현실로 성큼 다가서 버린 정보화 사회,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쉽게 머리 속에서 명멸해 간 21세기적 사회의 전망을 읽으며 자기 자신을 추스르는 시간들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회한에 젖기도 한다.

  저자는 <새로운 시대의 예감> 편에서 21세기의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테크노 사피엔스가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정보를 지배하는 자가 성공할 수 있으며 문화가 경제보다 우선시되고, 개성과 창의력, 윤리 의식이 더욱 각광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한다. 요약하자면 미래 사회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분명한 사실은 미래 사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유토피아가 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것은 미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보장된 약속의 땅인 것이다.

  싫든 좋든 현실은 변했다. 현대는 정보를 유효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 또는 국가만이 일류가 될 수 있다. 대패와 망치로 기억되는 성장기 체험은, 달나라에는 계수나무 아래에서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는 옛 이야기처럼 까마득한 전설이 되어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흐름에 민첩하게 호응하지 않고는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마찬가지이다. 대변혁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사고 방식 자체를 적극적인 방향으로 바꾸어야만 한다. 그것이 테크노 사피엔스적 21세기 인류가 나아갈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