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의 일이다. 다소 '덜렁기'가 있는 한 여고생이 독서를 하고 있는 모습이 기특해서 표지를 들추어보았다. {좀머씨 이야기}란 제목이었다. 꽤 유명세를 탔던 작품이다. 그 아이가 그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도 유명세 영향이 클 것이었다. 그러나 좀머씨 이야기는 그 아이에게 어렵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어 짐짓 물어보았다. 그 아이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며칠 후 다시 그 아이에게 물었다. 그 아이는 대답했다. 도대체 뭘 말하려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아이는 자기의 지적 수준이 많이 모자란 까닭이라며 자책을 했다. 내용을 소화하지 못한 이유가 지적 소양의 부족 때문인가, 아니면 인생 경험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이러한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사례는 다양하겠지만 굳이 청소년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먹물 깨나 먹었다는 사람들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독서의 풍토가 어긋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독서의 방법에 대해서 숱하게 들어 왔다. 심지어 진언(眞言)을 외듯 꿰뚫고 있을 정도이다. 꼼꼼하게 읽기는 정독, 많이 읽기는 다독, 빨리 읽기는 속독, 눈으로 읽기는 묵독, 소리내어 읽기는 음독, 필요한 것만 뽑아서 읽기는 발췌독 또는 선독, …….
그러나 실제적인 글읽기에서 이러한 독서법은 그다지 유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많은 이론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채 갈래짓기에 급급하듯이 독서의 방법론 역시 지나치게 관념적일 뿐이다. 때문에 공허하다.
도대체 문학 작품을 왜 읽는가? 국정교과서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감동과 쾌락'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 감동을 주는 힘이 약하거나 흥미를 주는 요소가 부족한 작품이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감동과 쾌락만을 위해서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일반소설보다도 쾌락적 요건을 훨씬 충족시켜 주는 무협지나 추리 소설류는 상대적으로 많이 읽히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근원적인 그 무엇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보르헤스나 페터 한트케의 작품 등을 읽는 이유를 말이다.
물론 감동을 주는 책은 많이 있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등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덧붙여 교훈을 주는 책들도 있다.
문제는 모든 소설이 내용 위주로 창작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부 작품은 오히려 처음부터 내용성을 어떻게 담보해 낼 것이냐에 대한 관심보다는 형식이나 기교에 치중하려는 경향도 있다. 가령, 이상의 <날개>를 읽고서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될 정도로 진한 감동을 느끼기를 원한다면 그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날개>를 읽고서 도대체 어떤 쾌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상은 한국을 대표하는 천재 작가로 언급되곤 한다. 문학작품을 읽는 목적이 단지 감동과 쾌락만을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왜 이상의 천재성에 대해서 시비를 걸지 않는가? 가장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문학사나 평론가들의 입을 통해 너무 많이 언급이 된 그 작품에 시비를 걸다가는 자칫 무식한 놈이라고 매도를 당할 것이 겁이 나서이겠지만,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날개>의 경우 다른 작품 속에는 없는 특이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교에서 비롯한다.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니 심리주의적 흐름이니 하는 수사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것은 새로움과도 통한다.
문제는 초학자 시절에 어떤 소설 작품은 기교나 형식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단순한 지식을 전달받느냐 하는 점이다. 입시를 치르기 위해 특정 작가의 특징적인 경향만을 암기해 두었다가 시험을 치른 후에는 몽땅 잊어버리고 그와 같은 작품을 다시 접했을 때 다소간 황당함을 맛보아야만 하는 것이 일반적인 독서 풍토는 아닐는지?
기교 중심의 창작품은 많이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극한 상황에서의 '의식의 흐름'을 치밀하게 그려낸 작품인 오상원의 <유예>라든지, 역시 '의식의 흐름'의 기법으로 6·25와 80년대를 접목한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 다채로운 환기를 끝없이 펼쳐내는 문체의 복합성을 보여주는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동시 묘사법을 구사하고 있는 김성한의 <5분 간>, 현실과 환상, 실재와 비실재, 현재와 과거의 혼재, 다양한 대중문화요소를 등장시킨 '문화형성소설'인 윤대녕 <은어낚시통신>, 한국적 토속 세계와 환상적 리얼리즘을 결합한 이제하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98년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이치은의 <권태로운 자들 소파씨의 아파트에 모이다>, 독특한 문체로 주목받는 하일지의 <경마장 시리즈> 등등. 언급한 작품들이 내용상 주목받을 수 있는 요소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기법적인 가치면에서 더 큰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더욱 황당한 것은 내용적 접근이든 아니면 기교적 관심에서든 간에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음에도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작품들도 많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주로 문학사적인 가치를 가지는 작품들의 경우이다. 예컨대, 이광수의 <어린 희생>이나 <무정>에서 일반 독자들이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한탄하거나 문학 작품이란 알 수 없는 것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문학과의 벽을 스스로 쌓아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史)적인 업적을 남긴 작품들을 간단히 언급해 보면, 실존주의의 개막을 알리는 사조사적 소설인 장용학 <요한시집>, 분단 이후 남북 분단 이데올로기를 최초로 다룬 작품인 최인훈의 <광장>, 분단 문제를 한국 사회 전체와 관련시켜 형상화한 유일한 소설이라고 과찬되었던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 진보적인 문학, 혹은 민족 문학의 소재와 영역을 넓혔다는 최윤 <회색 눈사람>, 운동 문학이 시들해지는 자리에서 서정성을 회복하여 90년대적 지평을 넓혀준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가 이 자리에 놓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거론된 작품들은 다소 대중성을 획득한 작품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독자의 머리와 가슴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들도 있다. 그것들은 대체적으로 사색의 순간을 부여함으로써 독자의 눈을 페이지에 머물게 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90년대 한국 독자들에게 강하게 다가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지난 시절에 대한 반추의 시간을 제공하는 하루키의 인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대중적 통속 소설의 범주에 들 수 있는 이문열의 <레테의 연가>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지는 작품이다. 달리 말하면 독자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대중 소설가 이문열의 경우는 좋은 소설의 요소로써 이 점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작품 중에서는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다. 단순히 반영의 차원에 머물고 있는 작품들도 있지만 나아가 사회 변혁의 전망을 제시해 주는 글들도 있다.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라든지 광복을 맞은 지식인의 변화를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포착한 작품인 이태준 <해방전후>, 50년대 전후 사회의 피폐상을 세태묘사 기법으로 그린 손창섭 <잉여인간>, 한가족의 비참한 생활을 중심축으로 삼아 전후문제를 고발한 이범선 <오발탄>, 이산과 통일 문제를 중층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이호철의 <닳아지는 살들>, 공동체적 유대가 파괴된 세태의 축도를 묘파한 김승옥의 <무진기행>, 근대적인 도시에서의 소외된 인간 관계를 그린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객관적 관찰자적 시각으로 소외된 자들의 삶을 차분히 그려낸 서정인의 <강>, 개발 독재 시대에 '근대화'에 들려 살아온 세대에 대한 비가(悲歌)를 그리고 있는 양귀자 <한계령>,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떠돌이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황석영 <삼포가는 길>, 도시빈민과 그 민생문제를 소설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80년대에 꽃핀 노동 문학의 선구적 구실을 담당한 윤흥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산업 사회의 타락으로 야기된 소외된 삶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4·3 항쟁의 비극을 담아, 일관되게 제주도의 문제만을 소설적 제재로 삼아온 현기영의 작품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작품 계열은 계속 이어진다. 우리에게 미국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묻고 있는 남정현 <분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법칙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김정한 <모래톱 이야기>, 산업자본주의와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하에서의 소외를 그리고 있는 최인호 <타인의 방>, 노동의 현실과 이상을 밀도 높게 형상화한 방현석 <새벽출정>, 분단 문제에 관한 진지한 반성을 요구한 전상국 <아베의 가족>, 민중에게서 미래적 전망을 찾아내어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황석영 <객지>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아래 글에서는 소설 읽기의 일반적인 전형을 세워보자.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인정받는 작품만큼이나 중요한 작품군은 인간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는 글들이다. 시종일관 대화체 문장으로만 진행하며 인간의 내면 심리를 천착하는 마르그리뜨 뒤라스 <고독한 끌레르>, 사회 구조의 현실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문제성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의 역방향에서 문제성을 심각하게 야기하며 물의를 일으키는 인물을 다루고 있는 채만식 <논이야기>, 운명(팔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통해 영원한 인간성의 전모를 탐구하고 있는 김동리 <역마>, 우정을 통한 인간성 회복을 묘사한 황순원의 <학>, 시원적(始原的)인 것에 뿌리박고 사는 갯사람들의 건강한 생명력을 그리고 있는 오영수의 <갯마을>, 전통적인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주인공의 초상을 그린 선우휘의 <불꽃>, 카멜레온적 삶의 한 전형을 완벽히 살린 전광용의 <꺼삐딴 리>, 역사의 폭력성에 굴하지 않는 아름다운 일생을 그린 김정한의 <수라도>, 전쟁에서의 전상자 형(병신)과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동생(머저리)의 삶을 통해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주의와 혹독한 적자생존의 경계를 보여준 이청준 <병신과 머저리>, 결국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는 서머셋 몸 <인간의 굴레>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실에 대한 끈질긴 집착을 다루었기 때문에 평가를 받는 작품도 있다. 이청준의 <이어도>가 이 경우에 속한다.
또한 일반 독자들의 삶과는 많은 괴리감을 보여주지만 작가(예술가), 그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까닭에 긍정적 평가를 받는 작품들도 있다. 최인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문열 <금시조>가 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환기하는 작품들도 있다. 작가의 영과 육을 낳고 길러준 고향의 인간사를 둘러싼 이야기인 이문구 <관촌수필>이 대표작으로 손꼽힐 만하다.
소중한 유년기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까닭에 아름다움을 획득하게 된 경우도 있다. 세상의 비밀을 서둘러 알게 된 어린 영혼의 내면 성찰을 통해 유년의 억압된 기억과 그 기억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가 이 계열에 속한다.
마침내 화해에 도달하는 한의 미학을 그려내어 민족의 보편 정서를 소설적으로 형상화한 송기원 <다시 월문리에서>도 소중한 작품이다.
성(性)이데올로기를 반성적으로 조망한 전후(戰後)의 풍경첩인 오정희의 <유년의 뜰> 같은 작품은 여성주의 소설 작품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 값어치를 인정받는다. 이문열 <선택>의 경우는 90년대 여성주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반향을 얻어내고 있다.
종교적 세계를 다루는 작품들도 있다. 초월과 구원 등의 문제를 보여주는 작품인 김동리의 <등신불>, 종교를 외피(外皮)로 한 사회, 역사적 실천을 다짐하는 김성동의 <만다라>, 남북분단으로 인한 한 집안의 갈등을 샤머니즘적 세계관으로 형상화한 윤흥길의 <장마> 역시 기념비적 작품이다. 구효서의 <비밀의 문>,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도 언급할 만하다.
한국 소설 속에 유목과 사막 등 새로운 공간을 설정하여 일상과 영원이 교차하는 낭만적 공간을 그려낸 윤후명의 <돈황의 사랑> 같은 경우는 김동인의 <배따라기>와 함께 낭만주의적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역시 소중한 소설 작품이다.
거칠게 탐색한 속에서도 소설의 유형은 너무나 갈래가 많다. 그럼에도 가장 유효성을 인정받고 있는 국정교과서식 독서법에서는 소설 읽기에 가장 적합한 독서법으로써 '통독'만을 권장하고 있다. 통독이란 무엇이던가? 줄거리 파악 위주의 독서법이 아니던가? 그것만으로써 저 다양한 소설의 유형을 어떻게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인가?
관객이 없는 연극 무대란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독자가 없는 창작 행위란 생각할 수 없다. 생산자와 향수자가 정서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소통의 길이 열려야 한다. 그 소통의 길이란 다양한 글의 유형을 설정해 두고서 거기에 적합한 글읽기의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러한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사례는 다양하겠지만 굳이 청소년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먹물 깨나 먹었다는 사람들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독서의 풍토가 어긋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독서의 방법에 대해서 숱하게 들어 왔다. 심지어 진언(眞言)을 외듯 꿰뚫고 있을 정도이다. 꼼꼼하게 읽기는 정독, 많이 읽기는 다독, 빨리 읽기는 속독, 눈으로 읽기는 묵독, 소리내어 읽기는 음독, 필요한 것만 뽑아서 읽기는 발췌독 또는 선독, …….
그러나 실제적인 글읽기에서 이러한 독서법은 그다지 유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많은 이론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채 갈래짓기에 급급하듯이 독서의 방법론 역시 지나치게 관념적일 뿐이다. 때문에 공허하다.
도대체 문학 작품을 왜 읽는가? 국정교과서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감동과 쾌락'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 감동을 주는 힘이 약하거나 흥미를 주는 요소가 부족한 작품이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감동과 쾌락만을 위해서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일반소설보다도 쾌락적 요건을 훨씬 충족시켜 주는 무협지나 추리 소설류는 상대적으로 많이 읽히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근원적인 그 무엇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보르헤스나 페터 한트케의 작품 등을 읽는 이유를 말이다.
물론 감동을 주는 책은 많이 있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등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덧붙여 교훈을 주는 책들도 있다.
문제는 모든 소설이 내용 위주로 창작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부 작품은 오히려 처음부터 내용성을 어떻게 담보해 낼 것이냐에 대한 관심보다는 형식이나 기교에 치중하려는 경향도 있다. 가령, 이상의 <날개>를 읽고서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될 정도로 진한 감동을 느끼기를 원한다면 그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날개>를 읽고서 도대체 어떤 쾌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상은 한국을 대표하는 천재 작가로 언급되곤 한다. 문학작품을 읽는 목적이 단지 감동과 쾌락만을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왜 이상의 천재성에 대해서 시비를 걸지 않는가? 가장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문학사나 평론가들의 입을 통해 너무 많이 언급이 된 그 작품에 시비를 걸다가는 자칫 무식한 놈이라고 매도를 당할 것이 겁이 나서이겠지만,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날개>의 경우 다른 작품 속에는 없는 특이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교에서 비롯한다.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니 심리주의적 흐름이니 하는 수사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것은 새로움과도 통한다.
문제는 초학자 시절에 어떤 소설 작품은 기교나 형식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단순한 지식을 전달받느냐 하는 점이다. 입시를 치르기 위해 특정 작가의 특징적인 경향만을 암기해 두었다가 시험을 치른 후에는 몽땅 잊어버리고 그와 같은 작품을 다시 접했을 때 다소간 황당함을 맛보아야만 하는 것이 일반적인 독서 풍토는 아닐는지?
기교 중심의 창작품은 많이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극한 상황에서의 '의식의 흐름'을 치밀하게 그려낸 작품인 오상원의 <유예>라든지, 역시 '의식의 흐름'의 기법으로 6·25와 80년대를 접목한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 다채로운 환기를 끝없이 펼쳐내는 문체의 복합성을 보여주는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동시 묘사법을 구사하고 있는 김성한의 <5분 간>, 현실과 환상, 실재와 비실재, 현재와 과거의 혼재, 다양한 대중문화요소를 등장시킨 '문화형성소설'인 윤대녕 <은어낚시통신>, 한국적 토속 세계와 환상적 리얼리즘을 결합한 이제하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98년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이치은의 <권태로운 자들 소파씨의 아파트에 모이다>, 독특한 문체로 주목받는 하일지의 <경마장 시리즈> 등등. 언급한 작품들이 내용상 주목받을 수 있는 요소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기법적인 가치면에서 더 큰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더욱 황당한 것은 내용적 접근이든 아니면 기교적 관심에서든 간에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음에도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작품들도 많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주로 문학사적인 가치를 가지는 작품들의 경우이다. 예컨대, 이광수의 <어린 희생>이나 <무정>에서 일반 독자들이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한탄하거나 문학 작품이란 알 수 없는 것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문학과의 벽을 스스로 쌓아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史)적인 업적을 남긴 작품들을 간단히 언급해 보면, 실존주의의 개막을 알리는 사조사적 소설인 장용학 <요한시집>, 분단 이후 남북 분단 이데올로기를 최초로 다룬 작품인 최인훈의 <광장>, 분단 문제를 한국 사회 전체와 관련시켜 형상화한 유일한 소설이라고 과찬되었던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 진보적인 문학, 혹은 민족 문학의 소재와 영역을 넓혔다는 최윤 <회색 눈사람>, 운동 문학이 시들해지는 자리에서 서정성을 회복하여 90년대적 지평을 넓혀준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가 이 자리에 놓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거론된 작품들은 다소 대중성을 획득한 작품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독자의 머리와 가슴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들도 있다. 그것들은 대체적으로 사색의 순간을 부여함으로써 독자의 눈을 페이지에 머물게 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90년대 한국 독자들에게 강하게 다가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지난 시절에 대한 반추의 시간을 제공하는 하루키의 인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대중적 통속 소설의 범주에 들 수 있는 이문열의 <레테의 연가>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지는 작품이다. 달리 말하면 독자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대중 소설가 이문열의 경우는 좋은 소설의 요소로써 이 점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작품 중에서는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다. 단순히 반영의 차원에 머물고 있는 작품들도 있지만 나아가 사회 변혁의 전망을 제시해 주는 글들도 있다.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라든지 광복을 맞은 지식인의 변화를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포착한 작품인 이태준 <해방전후>, 50년대 전후 사회의 피폐상을 세태묘사 기법으로 그린 손창섭 <잉여인간>, 한가족의 비참한 생활을 중심축으로 삼아 전후문제를 고발한 이범선 <오발탄>, 이산과 통일 문제를 중층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이호철의 <닳아지는 살들>, 공동체적 유대가 파괴된 세태의 축도를 묘파한 김승옥의 <무진기행>, 근대적인 도시에서의 소외된 인간 관계를 그린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객관적 관찰자적 시각으로 소외된 자들의 삶을 차분히 그려낸 서정인의 <강>, 개발 독재 시대에 '근대화'에 들려 살아온 세대에 대한 비가(悲歌)를 그리고 있는 양귀자 <한계령>,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떠돌이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황석영 <삼포가는 길>, 도시빈민과 그 민생문제를 소설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80년대에 꽃핀 노동 문학의 선구적 구실을 담당한 윤흥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산업 사회의 타락으로 야기된 소외된 삶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4·3 항쟁의 비극을 담아, 일관되게 제주도의 문제만을 소설적 제재로 삼아온 현기영의 작품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작품 계열은 계속 이어진다. 우리에게 미국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묻고 있는 남정현 <분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법칙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김정한 <모래톱 이야기>, 산업자본주의와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하에서의 소외를 그리고 있는 최인호 <타인의 방>, 노동의 현실과 이상을 밀도 높게 형상화한 방현석 <새벽출정>, 분단 문제에 관한 진지한 반성을 요구한 전상국 <아베의 가족>, 민중에게서 미래적 전망을 찾아내어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황석영 <객지>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아래 글에서는 소설 읽기의 일반적인 전형을 세워보자.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인정받는 작품만큼이나 중요한 작품군은 인간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는 글들이다. 시종일관 대화체 문장으로만 진행하며 인간의 내면 심리를 천착하는 마르그리뜨 뒤라스 <고독한 끌레르>, 사회 구조의 현실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문제성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의 역방향에서 문제성을 심각하게 야기하며 물의를 일으키는 인물을 다루고 있는 채만식 <논이야기>, 운명(팔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통해 영원한 인간성의 전모를 탐구하고 있는 김동리 <역마>, 우정을 통한 인간성 회복을 묘사한 황순원의 <학>, 시원적(始原的)인 것에 뿌리박고 사는 갯사람들의 건강한 생명력을 그리고 있는 오영수의 <갯마을>, 전통적인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주인공의 초상을 그린 선우휘의 <불꽃>, 카멜레온적 삶의 한 전형을 완벽히 살린 전광용의 <꺼삐딴 리>, 역사의 폭력성에 굴하지 않는 아름다운 일생을 그린 김정한의 <수라도>, 전쟁에서의 전상자 형(병신)과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동생(머저리)의 삶을 통해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주의와 혹독한 적자생존의 경계를 보여준 이청준 <병신과 머저리>, 결국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는 서머셋 몸 <인간의 굴레>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실에 대한 끈질긴 집착을 다루었기 때문에 평가를 받는 작품도 있다. 이청준의 <이어도>가 이 경우에 속한다.
또한 일반 독자들의 삶과는 많은 괴리감을 보여주지만 작가(예술가), 그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까닭에 긍정적 평가를 받는 작품들도 있다. 최인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문열 <금시조>가 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환기하는 작품들도 있다. 작가의 영과 육을 낳고 길러준 고향의 인간사를 둘러싼 이야기인 이문구 <관촌수필>이 대표작으로 손꼽힐 만하다.
소중한 유년기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까닭에 아름다움을 획득하게 된 경우도 있다. 세상의 비밀을 서둘러 알게 된 어린 영혼의 내면 성찰을 통해 유년의 억압된 기억과 그 기억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가 이 계열에 속한다.
마침내 화해에 도달하는 한의 미학을 그려내어 민족의 보편 정서를 소설적으로 형상화한 송기원 <다시 월문리에서>도 소중한 작품이다.
성(性)이데올로기를 반성적으로 조망한 전후(戰後)의 풍경첩인 오정희의 <유년의 뜰> 같은 작품은 여성주의 소설 작품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 값어치를 인정받는다. 이문열 <선택>의 경우는 90년대 여성주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반향을 얻어내고 있다.
종교적 세계를 다루는 작품들도 있다. 초월과 구원 등의 문제를 보여주는 작품인 김동리의 <등신불>, 종교를 외피(外皮)로 한 사회, 역사적 실천을 다짐하는 김성동의 <만다라>, 남북분단으로 인한 한 집안의 갈등을 샤머니즘적 세계관으로 형상화한 윤흥길의 <장마> 역시 기념비적 작품이다. 구효서의 <비밀의 문>,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도 언급할 만하다.
한국 소설 속에 유목과 사막 등 새로운 공간을 설정하여 일상과 영원이 교차하는 낭만적 공간을 그려낸 윤후명의 <돈황의 사랑> 같은 경우는 김동인의 <배따라기>와 함께 낭만주의적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역시 소중한 소설 작품이다.
거칠게 탐색한 속에서도 소설의 유형은 너무나 갈래가 많다. 그럼에도 가장 유효성을 인정받고 있는 국정교과서식 독서법에서는 소설 읽기에 가장 적합한 독서법으로써 '통독'만을 권장하고 있다. 통독이란 무엇이던가? 줄거리 파악 위주의 독서법이 아니던가? 그것만으로써 저 다양한 소설의 유형을 어떻게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인가?
관객이 없는 연극 무대란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독자가 없는 창작 행위란 생각할 수 없다. 생산자와 향수자가 정서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소통의 길이 열려야 한다. 그 소통의 길이란 다양한 글의 유형을 설정해 두고서 거기에 적합한 글읽기의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다.